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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생애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하여 피카소가 여인들 결혼과 동거한 여인들의 이야기와 입체파 중에 분석적 입체파와 종합적 입체파의 특징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피카소의 생애 여인들

에바 구엘 1912년

첫 번째 여인이었던 페르낭드와 헤어지 피카소는 그의 나이 31세에 두 번째 여인 에바 구엘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3년 동안 동거를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결핵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녀가 죽자 피카소는 매우 애통해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녀가 죽기 이전에 그는 이미 투병 중인 여인을 두고 다른 여자들과 애정 행각을 하고 돌아다녔습니다. 에바 구엘을 그린 옷을 벗은 에바가 바로 종합적 입체파 그림이기도 합니다.

올가 고콜로바 1917년

에바 구엘이 죽고 피카소는 러시아의 유명한 발레리나였던 올가와 생애 처음 결혼을 하게 됩니다. 피카소는 장 콕도의 부탁으로 무대 미술을 위해 로마에 갔다가 올가 고콜로 바를 만나게 됩니다. 로마에서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의 유명한 그림을 직접 경험을 하면서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피카소는 올가를 만나기 이전의 여자들과는 그녀가 달랐다고 합니다. 그녀는 최고의 발레니아였으면 그녀의 집안은 아주 부유하였습니다. 피카소가 그전에 보지 못한 바로 새로운 아름다움이었습니다. 피카소의 그림들은 그가 사랑하거나 그와 함께 동거한 그리고 결혼한 여자들의 성격이나 그들의 특성을 반영하는 게 많았습니다. 올가는 이런 그녀의 특성을 피카소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러시아 발레는 고전미입니다. 피카소가 이쯤에서 입체파를 끝내고 고전주의로 복귀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작품 의자에 앉아 있는 올가를 보면 그녀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여자와 똑같습니다 바로 고전주의인 것입니다. 이외에도 목욕하는 사람들 해변을 달리는 여인들 낮잠 판의 프루트 이런 작품들이 고전주의 대표작들입니다. 

마리 테레즈 월터 1927년

마리 테레즈 월터는 피카소가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나 여자입니다. 그녀는 금발에 오뚝한 코 회색의 눈을 가진 당시 17세의 소녀였습니다. 피카소는 이런 아름다움에 반해 그녀에게 모델을 해달라고 6개월을 따라다녔으며 1년 뒤 그녀가 부모의 동의 없이도 결혼할 수 있는 18세가 되자 올가와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와 동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피카소는 초현실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 겨울 앞에 선 처녀 목걸이를 한 누드 꿈 등이 초현실 주은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고도 합니다. 해변에서 해수욕하는 여인을 보면 사실은 완전 초현실주의는 아닙니다 달리의 기억의 지속 그림은 시계가 녹아 내 린느 등 꿈속 같은 무의식을 담아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피카소의 그림이 초현실주의적 그림은 아닌 것입니다 

도라 마르 1935년

도라 마르는 어린 마리 테레즈와는 매우 상반된 이지적이고 지적인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화가이자 사진작가이기도 했습니다. 피카소가 그녀를 만날 때쯤에는 사회참여에 많이 참여를 하였습니다. 우는 여자 도라 마르틔 초상을 보면 아직 입체차와 초현실주의 느낌이 살아 있습니다. 도라 마르의 초상을 보면 앞에 얼굴과 옆에서 본 얼굴이 한 그림에 담겨 있습니다. 도라 마르의 왼손에는 매니큐어를 한 손톱과 손바닥이 함께 보이기도 합니다. 한 그림 안에 다양한 시각을 다각적으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 그림은 현대 미술이 단순히 감상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임을 잘 보여 줍니다. 캔버스에 유채로 1937년작입니다. 프랑스 파리의 피카소 박물관 소장입니다.

프랑스와즈 질로 1943년

프랑스와즈 질로는 법대를 나온 화가입니다.  피카소가 이 시기에 그린 그림은 한국에서의 학살입니다. 한국전쟁 다시 황해도 신천에서 양민 학살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 그 학살의 보도를 보고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우리나렝서는 한때 금지되었던 그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그림에서 학살의 주체가 바로 미군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시기에 시체 안치소는 나치 점령기 프랑스의 슬픈 현실을 다룬 그림이기도 합니다. 

자클린 로크

마지막 여인이었던 자클린 로그는 1961년에 피카소와 결혼식을 올립니다 두에 나이는 50살의 차이로 그녀의 나이는 30세 피카소는 80의 노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노인과 어떻게 결혼할 수 있느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과 결혼했어요 늙은 사람은 그가 아니라 오히려 나입니다" 피카소는 말년에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등을 모티브로 많은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술성을 평가받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입체파

분석적 입체파

우리가 살펴본 것 같이 입체파는 한 사물이나 한 인물을 그릴 때 정면서 보는 시각 옆에서 보는 시각 가슴 이든 엉덩이든 얼굴이든 한 화면에 담는 식이었습니다. 반면에 분석적 입체파는 각 면들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자릅니다 그런 다음에 그 모든 것에 평면에 모두 붙여서 하나하나 보여주는 것입니다. 피카소의 럼주 병이 그 대표적입니다. 럼주 병을 보면 럼주 병을 펼쳐서 각 면들을 자잘하게 자른 다음에 그것들을 벽에 맘대로 여기저기 붙여 노흡니다. 그런데 그 면들 모두 잘게 쪼개어져서 한 면에 붙이다 보니까 여러 색과 형태가 소멸되고 화폭에는 갈색과 알파벳 몇 개 밖에 남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브라크의 포르투갈 사람도 이와 같은 형태입니다. 사람의 모습을 모두 해체해 버리니까 그냥 보면 이게 사람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색과 형태가 모두 사라져 버려서 이게 그림인 줄 알 수가 없다 보니까 이 그림들이 미학적인 감동을 줄 수가 없게 되고 그러므로 인해 분석적 입체파가 오래가지 못하고 사라진 것입니다.

종합적 입체파

요즘 음악이든 여러 장르에서 콜라주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 콜라주가 종합적 입체파에서 등장합니다 콜라주는 풀로 붙이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피카소와 브라크 등의 입체파는 유화 캔버스에 한 부분을 신문지나 악보 벽보등을 풀로 붙였는데 이를 파피에 콜레라고 했습니다. 그림을 그린 다음에 앞면 뒷면 그리고 이것을 실제로 잘라서 그냥 막 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림의 앞면도 뒷면도 보여주는 그래서 형태도 드러나고 색도 그대로 살아있게 됩니다 이것이 종합적 입체파입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피카소의 기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합적 입체파는 이른 시기에 힘을 잃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술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은 누구나 비슷하게 그릴 수가 있습니다. 사물을 그린 다음에 면을 잘게 잘라서 붙이기 때문입니다.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

게르니카는 스페인의 지방도시 이름입니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페인 내전을 이해해야 합니다. 스페인 내전은 프랑코 군부와 파시스트들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한 무고한 시민들을 애도하기 위해서 그린 작품입니다. 이 내전이 발생하기 전인 1936년에 스페인 선거에서 좌파인 인민전선이 승리를 쟁취하여 스페인 내각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 일로 인하여 프랑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민주주의 세력인 공화파가 봉기를 하여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게 됩니다. 프랑크 총통을 지원하던 독일의 히틀러는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하게 됨으로 그 당시 무고한 시민들이 1500명이나 학살된 사건입니다. 게르니카는 초현실주의 작품입니다. 그림을 보면 동물과 사람들이 찢겨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두 팔을 벌려 절규하고 죽은 아이를 안고 울부짖기도 하고 가운데에는 촛불을 들고 세상의 진실을 밝히려는 여자도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다치거나 울부짖지 않고 유일하게 담담하게 서 있는 것은 그림 왼쪽의 수소입니다. 피카소는 그냥 이 사물을 수소일 뿐이라고 말하였지만 이 수소는 히틀러의 나치정권을 의미합니다. 이 그림의 소소는 그리스 신화의 미노타우로스를 연상시킵니다. 크레타 섬에 사는 미노타로스는 자라면서 사람을 마구 잡아먹는 난폭한 야성을 드러냅니다. 결국 미노스 왕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 속에 가둡니다. 바로 게르니카에는 이런  그리스 로마의 고전주의 참혹한 현실을 드러내는 사실주의와 초현실주의와 입체파의 경향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피카소가 오래 살았기에 그 시대에 자신의 입체차와 고전주의 초현실주의 경험을 이 한 그림에 담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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