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반응형

뭉크는 흔들리는 현대인의 실존을 그의 작품 절규를 통하여 어떻게 표현했는지 그의 생애와 작품들을 설명하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왜 우리는 그의 작품을 보면서 현재의 삶을 투영하는지 실존 고독 불안 그의 작품 세계 안으로 들어가 보자.

 

뭉크의 생애 및 작품 설명 표현주의 절규
뭉크의 생애 및 작품 설명 표현주의 절규

 

뭉크의 생애

 

뭉크는 1863년 노르웨이 남부의 작은 마을 뢰데이란 곳에서 태어났다. 그가 5살 되던 해에 그의 어머니는 결핵으로 그의 곁을 떠나갔다. 뭉크가 14살에 되던 때에는 그의 누나마저 같은 병으로 그의 곁을 떠났다 그가 17살이 되던 해에도 그의 동생도 그의 곁을 떠났다.

이렇게 가족의 죽음을 연달아 바라보면서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뭉크 자신도 만성천식을 앓고 있었고 그는 정신병 마서 가지고 살았다. 그에게 있어 죽음이라는 것은 늘 가까이에 도사리고 있는 가까운 존재였다.뭉크는 이런 죽음을 병실에서의 죽음과 죽음의 침상 곁에서라는 작품에서 죽음을 자기만의 독특한 색깔과 도구로 표현했다.

그에게 있어 죽음은 검은색 푸른색 녹색 등의 색을 2, 3개의 색으로 죽음의 실의 망연자실, 그리고 슬픔을 표현했다 그에게 있어 죽음은 늘 가까이 있는 것이기에 그의 작품 죽음의 침상 곁에서는 공간을 삶과 죽음의 공간으로 나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 그림들 속에서 사람들의 동작은 절제되어 있으며 표정도 단순하다 뭉크는 2, 3개의 단순한 색 죽음과 삶의 공간을 대비 바닥 벽 사람의 단순한 요소와 표현의 절제를 통해 죽음을 표현하고자 했다.에드바르 뭉크는 다리를 건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다 그의 작품이 절규이다.

그는 실제로 공황발작을 앍고 있었다. 19세에 교외를 산책하다가 저녁노을이 지는 하늘이 온통 붉게 물든 것을 보고 문득 자연을 뚫고나오는 절규를 느꼈다고 한다 절규에서는 하늘이 빨갛게 물들어 있다 그리고 강물은 시꺼멓고 소용돌이치듯 굽어 휘몰아친다 이것은 뭉크의 내면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의 삶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렇듯 현대에 그림은 어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작가의 내면을 온전히 표현하는 것이다. 뭉크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의 작품이 이해가 된다.

뭉크와 표현주의

 

 

인상주의란 눈에 찰라의 순간을 눈에 보이는 외부의 대상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표현주의는 마음속에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사물을 보는 대상이 달라 보인다 자신의 감정과 감각을 사물에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선이나 형태, 색상, 구도, 등도 이런 마음의 상태의 표현의 수단일 뿐이다. 이런 그림은 사실 고흐나 고갱 등의 인상주의 학파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인상주의 학파들도 그들의 선이나 색채, 형태 등을 정형화된 틀을 벗어 버리고 과감하게 색상을 사용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원근법과 형태 등을 무너 뜨으렷다. 뭉크의 실존은 표현주의 대표작이다

그가 인간의 실존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뭉크가 살았던 시대는 19세기말이다 그 당시의 사회 현상은 세기말적인 현상이 사회 곳곳에 만연했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세계 1차 2차 대전이 얼어났고 사회는 급속대로 급랭 해졌다

그리고 그 사회의 분위기는 불안 우울 암흑했다 그들은 실존에 대한 생각을 자각하면서 당시의 철학의 틀도 우리가 익히 아는 실존주의 철학이 등장하게 된다.실존은 고독이며 불인이다. 실존주의 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로부터 철학자 파스칼까지 거슬려 올라가 보면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고 인간은 신과 허무의 중간자였다.

인간의 생각은 그냥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허무에 떠밀려 갈대의 앙상한 가느다란 갈대와 같은 흔드리는 존재였던 것이다. 신과 허무의 중간자인 인간은 항상 고독하고 불안한 존재였던 것이다.뭉크는 이런 인간의 내면상태를 그의 그림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화가라는 것이 눈앞의 광경만 그릴뿐 아니라 자신의 내면까지 묘사해야 한 것이다.

이제 어떤 틀 유형을 벗어나서 다른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려내는 것이 화가인 것이다. 유형적인 틀은 카메라가 등장함으로 카메라만큼 잘 표현할 수 없다. 이제 뭉크는 당시의 세기말 적인 실존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실존이 불안이다면 그 불안을 그림으로 어떻게 끄집어내어 그려야 하는 건가?

우리가 좋아하는 그림들 중 르네상스의 그림들은 완벽한 대칭구도를 가지고 있다. 조화와 균형미가 있기 때문에 이런 그림들을 보면서 우리는 불안해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마티스의 춤 2와 몬드리안의 빨강 파랑 노랑의 구도를 보면 안정감이 있다 불안하지 않다

그런데 19세기 인상주의 화가인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발코니와  뭉크의 부두에서 소년의 그림을 보면 구도가 경사져 있다. 이 그림들은 구도의 변화 때문에 우리는 그림 속에서 불안을 느끼게 된다.

뭉크의 절규

 

 

뭉크의 절규를 유심히 관찰해 보자 뭉크의 그림에서 사선으로 표현된 다리의 난간에 강물이 크게 흔들리는 곡선으로 와서 부딪히는 것을 보게 된다. 심지어 절규하는 사람의 머리와 얼굴도 흔들리는 곡선으로 표현했다. 몸도 흔들리는 곡선이다. 직선에 흔들리는 곡선이 가서 부딪히는 것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불안감을 느끼는 형태이다. 

불안이란 말과 동의어는 미확정이다. 아무리 위험이라 하더라도 이미 알고 있는 불안은 모르는 불안보다 덜 불안하다 눈앞에 보이는 가시발길이 있다면 눈에 보이는 가시발길이 있기에 눈에 보이는 위험이다. 하지만 우리가 눈을 가린 채 낯선 곳에 가서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곳을 걸어간다면 우리는 누구나 불안해 휩싸이게 된다.

한걸음의 발길 이후 낭떠러지일지 가시발길일지 우리는 알 수 없기에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현대사회의 불안전한 사회에 우리는 언제 떨 지지 모르는 사고와 사건 자연재해의 예상치 못하는 사회현상에서 살고 있다 현대인의 삶은 인간의 통제범위를 넘어설 때 항상 무엇인지 모르는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을 때 불안하게 된다 바로 이런 뭉크의 그림이 현대 사회의 위험에 실존의 위험을 표현하는 것이다.

불안은 불확실성의 미확정에서 오듯이 절규를 보면 사람의 눈, 코, 입 그리고 얼굴 형태도 확정되지 않았다. 그림에 뒤쪽에 서있는 두 사람도 성별을 알 수 없다. 뭉크의 절규에는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까지가 강인지 경계의 불확설성이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확정되지 않는 그링은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뭉크의 연작인 절망, 절규, 불안을 보아도 그의 그림에서는 사선구도에 직선이 구 불구빌 한 곡선에 부딪히게 그려져 있다.

모든 것이 모호하며 경계가 없고 확정되지 않았다. 색감도 원색과 강력하게 대비된다. 그런 그림을 볼 때 우리는 불안하고 현대사회가 불안 위험을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