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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다비드의 생애와 작품을 통해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에 나타난 신고전주의  즉 고대 고전의 부활을 목표로 여러 예술분야에 나타난 성향 중 그중에서도 미술을 생각해 보자

 

자크 다비드의 생애 및 작품 설명

자크 다비드의 생애

자크 다비든느 1748~1825년의 삶을 산 그 당시의 프랑스의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이다. 우리는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에 나타난 고전으로 다시 돌이키는 운동으로 고고학적인 정확성과 합리적인 미학을 바탕으로 하는 예술분야의 대표적인 화가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신고전주의는 기존 로코코 양식의 지나친 장식이나 화려함을 따르지 않고 그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이전 고전으로 다시 돌이키는 경향이다. 그런데 이게 18세기에 다시 나타났으므로 신고전주의라고 말하는 것이다. 신고전주의의 가장 두드려지는 큰 특징은 통일성 질서 정연함 그리고 명확하고 형식과 내용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바로 다비드가 이런 신고전주의의 선두인 것이다. 다비드는 엘리트 코스인 빈의 로열 아카데미에서 미술 교육을 훈련받았다 그의 나이 27살에는 로마에 가서 5년간 그리스 로마의 고전작품인 미켈란젤로 카라바조 등과 같은 미술을 그리며 그림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 당시의 사회상황을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비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정치적인 성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시기에는 혁명당원이었다. 1794년에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고 자코뱅당이 무너질 때 그도 투옥이 되어었다. 그러다 가까스로 사형만은 면하라 수 있었다 그가 급진 공화파인 자코뱅당의 로베스 피에르 마라 등과도 친분이 있었다. 그는 1799년에 사비니 연인의 중재라는 작품을 통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5년의 전시 수익금을 통하여서 대저택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한때의 혁명 전사였던 그는 이제 누구보다 부자의 반열에 오르게 된것이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패하고는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유배되었고 그도 국외로 추방되어 그의 삶을 외국에서 마치게 된다.

자크 다비드 작품 설명

자크 다비드의 작품 중 나폴레옹을 그린 성 베르나르 협곡에서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과 폴 들라로슈의 작품 중 알프스 산맥을 넘는 보나파르트를 비교해 보자 우선 첫번째의 그림에 나폴레옹은 당찬 모습이다 건장한 체격과 붉은 망토를 휘날리면서 백마 위에 한 손을 정상을 향해 가리키면서 진군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이다. 나폴레옹이 1800년 6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 대군과의 결전을 위해 마렝고 평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알프스의 험난한 산맥을 넘고 있는 모습이다 그림에는 과거에 알프스를 넘는 역사적 영웅인 한니발과 샤를마뉴 대제의 이름 위에 나폴레옹의 이름을 선명하게 새겨 넣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로는 나포레옹의 체격은 아주 작았다 그의 키는 160cm의 키에 아주 추남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항상 신체적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이 그림은 사실적 그림이기보다는 나폴레옹을 돋보이게 그린 그림이다. 실크로드 상인들도 산을 넘기 위해서는 당나귀나 노새에 짐을 실어 날랐다 그러네 말은 이런 알프스 같은 험준한 산을 넘어가기에는 적당하지 못하다. 원래의 그림으로는 키 작은 왜소한 남자가 백마가 아닌 당나귀를 타고 알프스를 넘는 그림이 더욱 사실적 일 것이다.  알프스 산맥을 넘는 보나파르트의 작품에서의 나폴레옹의 모습이 훨씬 더욱 사실적이고 역사적이다. 이게 바로 신고전주의 다비드와 사실주의 들라로슈의 나폴레옹의 차이이다.

신고전주의

우리는 신고전주의의 등장의 배경을 알아야 한다 당시의 혁명이 현실을 타파하고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어느 역사이든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 호탁한 사회를 정화시키기 위한 여러 운동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런 운동 혁명은 늘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했던 시기는 1783년이다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은 자유와 평등 삼권분립등의 이념 아래 민주주의 국가를 세웠다. 이런 미국을 바라보면서 프랑스의 시민들도 절대왕정이 아닌 자신들이 위정자를 뽑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현실로 목격하게 된다 당시는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대이다 이 혁명이 후 1789년 프랑스에도 혁명이 일어났다 왕정이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들어왔다 그러나 구체제가 무너진다고 바로 사회가 안정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왕은 죽었지만 여전히 왕당파는 남아 있었고 반대하는 급진 세력이 건제했을 뿐 아니라 주변의 나라들이 그리고 프랑스의 남은 귀족들은 정권을 다시 회복하기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프랑스혁명 이후 사회적 혼란은 더욱 심해져 가고 시민들의 삶은 더 피폐해졌다. 이때 등장 것이 군부이다. 

나폴레옹이 그 등장인물이다 나폴레옹의 나이 27살에 그는 왕정을 회복할려는 주변국들을 징벌하기 위해서 알프스의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군을 무찌르고 각국에 프랑스혁명의 정신을 나타낼 새로운 정부를 세웠습니다.  프랑스혁명정부는 나폴레옹에게 이집트 원정을 지시했음에도 그는 프랑스로 돌아와서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그는 즉시 헌법을 바꾸어서 자신이 종신의 통령에 올라섰다 그리고 2년 후에는 투표를 통해서 황제에 자리에 올랐다. 이렇듯 승승장구만 할 것 같은 그에게도 시련이 닥친다 그가 원정에 갔던 러시아에서 그는 실패를 하고 만다 그리고 연합군에 혼비백산하여 파리까지 빼앗기고 그는 유배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곳이 바로 엘바 섬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 엘바 섬을 탈출해 그 이듬해에 다시 황제에 올랐다 그해가 1815년이고 6월에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 프러시아 연합군에 의해서 철저하게 패배하고 다시 그는 세이트헬레나 섬에 유배되는 신세로 전략한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신고전주의에게는 나폴레옹의 외모가 어떤 모습이냐 보다 더 중요한게 있습니다 그것은 현실의 모습이 아니라 이상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그들에게 나폴레옹은 혁명가요 영웅입니다. 그렇기에 나폴레옹은 키가 작고 노새를 탄 모습이 아닌 너무나 늠름하고 멋진 모습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다비드가 나폴레옹을 그린 그림에 나폴레옹은 역사적 사실과 정반대인 이유가 이런 것입니다. 그들은 이상적인 이데아를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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