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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미술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고야의 생애 및 작품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그는 스페인 회화의 대표자이기도 하면서 고전적인 경향에서 탈피해 인상파의 시초를 보인 스페인의 천재 화가이다 더불어 낭만주의 화가이자 판화가 이기도 하다.

 

고야의 생애 및 작품 설명 옷 벗은 마야

 

고야의 생애

프란시스코 고야는 1746년에 스페인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페인 아라곤 지방의 푸앤데토드스의 가난한 농가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도금업자이자 처가살이를 하였다. 고야는 어릴 적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그가 14세가 되어서 화가 호세 루산으로 부터 미술을 배웠다. 나중에는 마드리드로 이사하여 당시의 최고의 궁정화가인 안톤 라파엘 맹수의 제자가 되기도 했다. 고야는 스승과 갈등이 깊어서 졸업을 인정받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1763년과 1766년에 왕립 미술 학회의 입회 신청서도 거부당했다. 그러나 1773년에는 고야는 베이유의 여동생 호세파와 결혼하였고 그 이후로 그는 왕립 미술 학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는 스페인의 궁정화가로 카롤로스 3세 카롤로스 4세 페르난도 7세에 걸쳐서 궁정화가로 지냈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들이 궁정화가의 일을 했다.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밀라노의 군주의 궁정화가였으며 라파엘로 루벤스 벨라스케스 모두 다 궁정화가이다. 그리고 궁정화가의 마지막 세대가 바로 고야이다. 그가 최초의 근대적 화가라고 인정을 받는 이유는 스페인의 군주국 시대임에도 그는 정치적인 그림을 비롯해서 누드화 초현실적인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고야는 1808년에 프랑스와 스페인 전쟁이 일어났을 때 여로 전쟁에 관련된 기록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는 프랑스혁명의 지지자이기도 하다. 판화집으로 유명한 Los Desastres de la Guerra는 전쟁의 잔혹한 학살과 비인도적인 만행을 기록한 작품이기도 하다. 1814년에 프랑스군이 떠나고 페르난도 7세가 왕위에 복귀했지만 그는 왕궁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이후에는 가정부 도냐 레오카디나와 그녀의 사생아 로사리오 웨이스와 함께 살았다. 고야는 1789년 43살의 나이로 카를로스 4세의 궁정화가가 된 이후로 10년 후에는 수석 궁정화가를 걸쳐 그가 은퇴했던 1823년 때까지 30여 년을 궁정화가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로코코 양식부터 낭만주의에 걸쳐 넓은 폭의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고야의 작품 설명

고야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낭만주의의 등장을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프랑스 혁명에서 부르주아들이 왕정을 타도하고 봉건주의 질서의 억압으로 고통당하는 민중들에게 새로운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으로 새로운 혁명의 시대를 도래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혁명은 무산되고 이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혁명이 실패하자 시대의 흐르는 좌절감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혁명의 환희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피의 숙청이 따랐으며 좌절과 배신감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현실 도피적인 사상이 팽배하였다 이럴 때 등장하는 사상이 바로 낭만주의인 것이다.  혁명이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말했지만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광기이고 공포였습니다. 사람들의 깊은 내면 안에 이제는 새로운 감성과 상상력 그리고 환상을 향한 목마름으로 인하여 그림의 색채들이 환상적인 분위기의 화풍으로 현실의 좌절의 그림들이 자연을 담는 풍경으로 예술 지상주의적인 그림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18세기의 낭만주의 화가인 고야가 등장하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1793년에서 1794년 고야는 일현의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이 시기에 이상한 소리와 청각상실에 고통에 시달렸던 날들입니다. 이로 인해 신경쇠약에 거린 그는 환상적이면서도 악명을 표현하는 어두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의 말년에 그린 검은 그림들이 바로 이런 것과 연관된 것입니다. 1799년에는 마카브르의 영향을 받아 82개의 판화들을 묶어서 카프리초스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합니다."모든 문명사회는 수 없이 많은 결점과 실패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는 악습과 무지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이기심으로 인하여 널리 퍼진 편견과 기만적 행위에 의한 것입니다"

1808년 5월 3일

1808년 5월 3일은 1814년의 작품으로 제목의 해에 스페인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을 그린 작품입니다. 1808년에 마드리를 점령한 나폴레옹이 스페인 왕자인 페르난도 7세 대신 자신의 동생 조세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으로 등극시켰고 이 사건을 으로 마드리드의 시민들이 분노하여 5월 2일 폭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날 폭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무참하게 학살을 당하게 됩니다. 그림에 보면 흰옷을 입은 사람이 만세 자세로 총을 겨룬 사람들을 막아서고 있습니다. 그림을 통해서도 긴박함이 묻어나는 장면입니다. 이 그림의 극적인 것을 더하기 위해서 명암의 처리로 더욱 집중하게 됩니다. 이 그림이 나중에 피카소에게 영향을 미쳐서 한국전쟁의 참상의 그림을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고야는 이런 전쟁의 참상을 많이 그렸는데 프랑스의 군인의 만행을 기록할 뿐 아니라 동시대의 스페인 사람들이 프랑스와 결탁하여 자국민에게 벌인 만행도 동일하게 역사에 기록했습니다. 

옷 벗은 마야

옷벗은 마야는 1795~1800년 작품으로 지금은 스페인 마드리드 프리도 미술관 소장입니다. 이 그림은 나체의 여인이 침대 위에 쿠션에 기대어 팔을 머리에 끼고 나체의 모습으로 누워있습니다. 그녀는 벌거벗었으나 그녀의 눈빛에는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당당하고 거리낌 없는 표정으로 자신이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기라도 하는데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18세기의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는 신분이 낮은 여자가 귀족의 옷을 입고 귀족을 흉내 내는 것이 유행했습니다. 오늘날 현대에도 사람들이 사진들을 통해서 자신의 현실보다 이상적인 모습으로 사진을 올리듯이 이런 풍조가 시대를 초월해서 사람의 본성입니다. 이때 이 여성을 마야라고 부르는 것은 마하라고 부르는데서 온 것입니다. 그림의 주인공은 스페인 수상이었던 마누엘 고도이의 정부입니다. 1803년에는 옷 입은 마하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똑같은 여자가 똑같은 포즈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어떤 비유나 신화적 그림이 아니라 실제 한 여성을 그렸기에 서양 예술 최초 등신대 여성 누드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처음에 신성 모독 논란이 야기되었고 그림의 옷을 입히라는 압력을 받았습니다. 그러냐 고야는 이것을 거부하고 그림에 그냥 옷 입은 마하라고 새로 그렸다고 합니다. 1808년에 고도이가 실각함으로 이 그림은 페르난도 7세에게 귀속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813년에는 스페인 종교재판에서 이 그림이 외설스럽다고 압수당했다가 1836년에 반환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옷 벗은 마야는 근대성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실제 한 여성의 누드였기 때문입니다. 신화적 상상이 아닌 몸의 은밀한 부분을 가리지도 않는 당당함 그리고 그녀의 눈빛 그 모든 것이 근대인의 모습이고 태도로 보이는 것입니다.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

고야는 고전적인 궁정화가의 모습만이 아니라 근대적인 화가의 모습을 두루 갖춘 화가입니다. 그의 작품의 초창기에 그렸던 초기작 양산 카를로스 4세의 가족등의 그림은 너무나 색채의 표현이 화려합니다. 그래서 이런 화풍을 마네 르느와르 세잔 반고흐 같은 인상주의 나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뿐만 아니라 피카소 달리 등의 입체파 표현주의 화가들의 그림에도 영감을 주었습니다. 고야의 그림중에 가장 인상적인 작품 중 하나는 바로 이 그림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입니다. 이 그림은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 즉 사투르누스가 제우스에게 쫓겨나서 스페인으로 도망갑니다. 그곳에서 인간에게 농사를 짓는 법을 가르치고 그는 아들 중 한 명에게 왕좌를 빼앗긴다는 예언으로 인하여 그의 5명의 아들들을 한 명씩 차례로 잡아먹습니다. 이 그림에서는 머리가 잘린 그의 자식입니다. 그의 모습은 광기에 사로잡혀 눈동자의 광기와 괴기한 모습에서 혁명기의 고야의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같은 것이 드러납니다. 고야도 47살부터 앓았던  병이 있었고 그의 자식 2명도 먼저 세상을 떠나보내야 했던 아픔이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고야의 자신의 담긴 내면의 감정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고야의 이런 그림을 그렸던 시기를 검은 그림이라고 말합니다. 검은 그림의 연작으로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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