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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입니다. 그를 가리켜 빛의 마술사라는 칭호로 불리고 있으며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은 야경군을 비롯한 작품들이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생애 및 작품을 통하여서 바로크 미술을 더욱 깊이 만나보겠습니다.

목차

렘브란트 생애

렘브란트 작품 설명

    렙브란트 생애 및 작품 설명 돌아온 탕자

     

    렘브란트 생애

    유럽 미술사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위대한 화가라 불리는 렘브란트는 1606년에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네덜란드 레이렌 지역이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제분업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그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개신교도였다.

    그는 레이던 대학교 인문학부에 입학했으나 대학공부를 포기하고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1624년에는 고향에서 아트리에를 열다. 그는 성경에서 많은 영감을 얻어서 초상화 화가로 자리 잡게 되는데 그의 그림의 특징은 카라바조 등 이전 시대의 화가에게서 영향을 받아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적으로 주는 키아로스 쿠로 기법을 능숙하게 사용한다.

    1626년부터는 독자적인 화실을 운영도 하였고 1631년에는 암스테르담에서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서 작업을 하였다. 당시에는 네덜란드는 다른 유럽 국가와 다르게 왕이나 귀족국가가 아닌 상업으로 성장한 부르주아 계급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나라이다. 그래서 성공한 상인들을 위한 초상화가 많이 그려졌다.

    이런 초상화에 빛과 그림자를 능숙하게 다루던 렘브란트의 그림이 인기를 얻었다. 1632년에는 암스테르담 의사협에로부터 의뢰받은 니콜라스 톨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가 호평을 받았다. 이때부터가 그에게는 10년간의 시간이 렘브란트의 전성기였다. 그는 명문가 집안의 딸 사스키아 판오이렌부르흐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초상화가 명성이 얻기 시작하자 제자들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후로는 초상화보다는 내면을 표현하고자 하는 종교적 신화적인 소재를 많이 그리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성공보다는 그만의 내면의 세게를 추구하게 된다. 1642년에 완성된 명작 야경은 암스테르담 자경단 협회의 의뢰로 그려진 작품이다.

    그는 당시의 기념사진 같은 단체 초상화에 만족하지 못하고 명암효과를 대담하게 시도하였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왜냐하면 똑같은 비용을 지불했음에도 누구는 주인공처럼 누구는 배경처럼 그려짐으로 인해서 당시의 그림의 구조와는 맞지 않았다. 

     

    렘브란트 작품 설명

    17세기 네덜란드는 세계 무역 중심 국가였다 네덜란드는 당시 스페인과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주변의 가톨릭 국가가 강세였다면 네덜란드는 개신교 공화국을 건설하게 된다. 이때부터는 교회의 그림이 주문이 없어지고 이때 새롭게 성장한 신흥상공업 계층과 전문적인 초상화 의사조합등의 집단 초상화를 많이 의뢰가 들어오게 되어졌다.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은 렘브란트가 1632년에 그린 작품으로 캔버스에 유채화이다 크기는 169.5*216.5cm이다 지금은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 네덜란드 헤이그 소장이다. 그림은 집단 초상화이다.

    이 그림은 암스테르담 외과의사 조합이 의뢰한 작품인데 이 그림 때문에 렘브란트는 의사들의 해부학 강의도 들었을 정도였다. 당시에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교회 그림 보다는 이런 새롭게 전문적으로 성공한 집단 초상화가 많은 의뢰가 들어올 때였다. 그림에 보면 죽은 시신이 누워있고 니콜라스 툴프 박사가 외과용 가위를 들고 시신의 팔을 해부하는 장면을 그렸다.

    사람들은 이 강의를 등기 위해서 시신에 몰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구조가 비대칭 구도이다. 사람들의 시선은 시신을 보는 사람 박사를 보는 사람 사람마다 각기 표정과 시선의 방향이 다르다 이런 구조로 인해서 이 그림은 더욱 생동감이 살아 있다. 그림의 배경으로는 어두운 검은색이 칠해져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의 주인공인 사람들의 얼굴은 밝은 명암으로 표현되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카라바조 루벤스의 기법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들과 렘브란트의 빛의 차이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렘브란트의 빛은 내부에서 스며 나오는 듯한 빛으로 은은한 빛을 투영함으로 인해서 빛과 어둠을 대조시키는 더욱 성숙한 빛의 표현 방식이다.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 해부학 강의보다 더욱 상황 연출력이 탁월하다. 적절한 인물 배치는 물론이고 역동적이고 긴장감 있게 작품을 그렸다. 이 그림을 통해서 그는 화가로도 명성을 얻고 부도 얻었다.

    야경꾼

    야경꾼은 1642년 작품으로 캔버스에 유채화이다. 지금은 레이크스 미술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소장이다. 이 그림은 자경단원인 바닝 코크 대장과 그의 부하들을 그린 집단 초상화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자경단원을 말고도 다른 사람들과 소녀도 등장한다.

    이런 그림들은 우리가 현대에 사진관에서 단체 사진을 찍는 것처럼 당시에는 카메라가 없어서 친목을 위해서 돈이 많은 성공한 사람들이 집단 초상화를 의뢰하는 그림이다. 이 작품에서 대원들의 모습이 각각 다른 복장을 하고 다른 모습으로 대열을 하고 있다. 이 그림은 원래는 낮에 장면이다고 한다.

    그런데 물감이 변질되어서 깜깜한 밤처럼 보여지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 때문에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 수 있는 그림이지만 이그림은 밝은 빛을 비춰 줌으로써 등장인물들 가운데서도 몇몇의 사람들에게 밝은 빛으로 시선을 몰아가 준다 앞에 서있는 바닝 코크 대장과 그의 부관에게는 밝은 빛을 스포트 라이트를 비춰주고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어두운 색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 균형감각이 돋보인다 뿐만 아니라 노란 드레스를 입은 소녀에게도 밝은 빛이 비치고 있다. 이런 그림의 특징 때문에 그의 인기는 시들해졌다. 그런데 렘브란트 그림의 바닝 코트 대장이 나중에 렘브란트를 찾아가서 자시의 초상화와 야경의 수채화를 모작을 부탁한다고 한다 이런 내용이 소문이 나면서 자경단원들에게 불만과 혹평을 퍼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은 처음에는 렘브란트가 촉망받는 화가였지만 첫 번째 부인과 결혼하고 그녀는 부잣집 딸이어서 지참금을 많이 가져왔는데 이들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녀가 죽음으로 인해서 경제적 부담도 커지고 당시에 로코코 시대 작품을 사람들이 선호하면서 인기가 급감해져서 이 시기 렘브란트가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

    돌아온 탕자의 자품은 렘브란트가 1663~1665년에 걸쳐서 완성한 작품이다. 크기는 262*205cm이다 지금은 에르미타주 미술관 러시아 상트레페테르부르크 소장이다. 돌아온 탕자는 성경의 내용을 가지고 와서 그린 그림이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내용으로 탕자는 미리 상속받을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아버지를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허랑방탕한 삶으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유산을 다 탕진하고 돼지들이 먹는 쥐엽 열매를 먹고 살아간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집이 다시 생각나서 아버지에게 돌아가는데 그의 모습은 아주 비참한 몰골에다 신발도 신지 못한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림에서는 삭발한 머리에 누더기 옷을 입고 아버지에게 돌아온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반갑게 맞아 준다 그러나 큰 아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동생을 바라보며 못마땅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다.

    아버지의 손은 아들의 등에 손이 얹혀있고 조명은 그곳을 비추고 있다. 이 그림 속에 성경의 은혜로운 모습이 그대로 녹아져 있다. 따뜻한 빛 속에 참회와 용서 치유와 화해가 느껴진다. 이런 빛의 강조하나로 이 모든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렘브란트가 빛의 마술사라 불러지는 것이다.

    돌아온 탕자는 바로 렘브란트가 죽기 2년 전에 그린 미완의 작품이다. 렘브란트의 삶도 후반에는 불행했다. 그는 사랑하는 자식과 아내를 잃었다 또한 그도 무분별한 사치와 도박으로 인생이 파탄되었다. 도박빚을 갚기 위해서 그는 늘 허덕이며 결국에는 파산을 하고 만다 렘브란트의 인생 말년이 비참한 것은 밥 한 끼 먹는 것조차 힘들었다고 한다 바로 자신의 이런 심적인 내용이 이 그림을 통해서 고스란히 녹아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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