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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크루아는 낭만주의 화가로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입니다. 그의 그림으로 유명한 것은 오른손에 삼색기를 들고 왼손에는 장총을 든 자유의 여신의 그림입니다. 오늘은 그의 생애와 작품을 나눠보겠습니다.

목차

    들라크루아 생애 및 작품 해석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들라크루아아의 생애

    들라크루아는 1798년에 프랑스 일드프랑스 샤랑통생모리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명은 페르디낭 빅토르 외젠 들라크루아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예술적인 재능을 갖추었습니다. 그의 이런 예술적 특징으로 인하여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 교육을 받았으며 그는 특히 그림과 문학게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의 스승은 페에르나르시스 게랭인데 그는 1822년 미술 학교  Ecole des Beaux-Arts에 입학하였고 그 이후로는 평생을 미술 작품 창작과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는 낭만주의 화가로 낭만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색채의 미술입니다. 들라크루아의 작품의 세계를 보면 그는 주로 역사적이고 신화적 그리고 종교적인 주례를 많이 다루었습니다.

    물론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표현을 강조하는 것이 그의 특징입니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 아주 작은 것까지 섬세하게 그리고 색상을 아주 감각적으로 묘사해 놓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의 그림은 화력하고 강렬합니다. 그의 여러 대표작인 있지만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자유를 인도하는 인민등으로 유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오리엔타릴즘과 이슬람 문화 같은 그림도 그렸습니다. 이런 그림들이 서양인들에게 동양의 이상화하는 로망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그의 작품들과 표현력이 프랑스 로마노주의에 대항하여서 독창적인 양식을 확립했고 프랑스 로맨틱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의 생전의 많은 작품들은 후대의 화가들에게 많은 도전의식과 역사적이고 미적인 가치를 알게 하여 많은 사람들로 그는 높이 평가를 받고 있는 화가입니다.

     

    들라쿠르아의 작품 설명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이 그림은 1830년 작품으로 캔버스에 유채화입니다. 크기는 260*325cm로 루브르 박물관 소장 중입니다.  이 그림의 특징은 1830년 7월 혁명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특징 같은 경우에는 그동안의 서양 미술을 볼 때는 주인공은 늘 권력층의 높은 계급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민중은 주인공이 아닙니다. 당시의 모든 문화가 그렇습니다.

    그림뿐 아니라 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너무나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도 모두가 다 주인공은 높은 계급의 사람들입니다. 리어와 맥베스 햄릿 다 왕이나 왕자입니다. 그런데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이제는 민중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프랑스의 대 문호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노트르담의 꼽추를 보면 전부 이제 왕이나 완자가 아닙니다. 주인공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꼽추나 전과자 도둑 사회의 등장인물이 주인공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제는 민중이 그 주인입니다. 빅토르 위고 같은 경우에는 프랑스혁명 때 그는 공화파로 활동을 했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레미제라블에서 배경은 시민군과 왕당파의 전투가 벌어집니다.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구두닦이 소년이 있습니다. 그는 이 전투에 앞장서 싸우다가 죽습니다. 이 소설의 배경적인 년도가 1832년 6월 봉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1830년 작품으로 2년 뒤의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 마음이 왠지 뭉클합니다. 자유의 여신 옆에 키 작은 꼬마 구두닦이 소녀가 한 손을 번쩍 들고 앞으로 진격을 합니다. 들라쿠르는 레미제라블에 소년을 이 그림의 작품의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바로 이 구두닦이는 프랑스의 미래인 것입니다. 수없이 쓰러진 사람을 뛰어넘고 그는 앞으로 앞으로 전진을 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절대로 후퇴하지 아니하고 진격하고 진화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잠시의 퇴보의 모습이 있다 할지라도 다시 이 구두닦이 소년처럼 수많은 깨어 있는 민중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유의 여신이 들고 잇는 삼색의 깃발을 보십시오 이 삼색기는 색깔의 각각의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발 밑에 죽어 누워있는 남자의 훈장은 낡은 귀족사회의 봉건체제의 붕괴를 의미합니다. 총을 든 남자는 국민군으로 이 전쟁에 직접 참전했던 들라크루아 자신입니다.

    이 그림은 1830년의 프랑스 7월 혁명을 그린 그림으로 사실적 역사화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 그림을 통해서 이 역사적 사건의 의미와 정신을 담고자 했습니다. 민중이 이제 역사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자유의 여신 마리안

    프랑스는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입니다. 프랑스에서 여자가 나서서 조국을 구하리라는 전설이 있답니다. 역사적인 인물로 바로 프랑스의 여자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잔다르크 입니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프랑스의 전설답게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정신으로 부르주아 노동자 서민 농민 계층이 왕과 귀족을 이기고 승리하는 이상이 담겨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이런 이념으로 이 작품을 낭만주의 역사적인 화풍으로 너무나 장엄하고 극적으로 이 그림을 통해서 모든 것을 다 담아 놓았습니다. 우리가 미국 뉴욕에 가면 자유의 여신상이 있습니다. 이 자유의 여신은 프랑스가 미국에 선물한 것입니다. 미국 독립 100주년을 맞이하여서 선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 장총을 들고 삼색기를 들고 앞으로 향해 먼저 뛰어 나가는 여인의 이름이 마리안입니다. 당시 프랑스혁명일 때 여자들은 수동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능동적으로 앞장서서 탄압과 불의에 맞섰습니다. 당시 1789년 프랑스혁명 때 그 시대는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프랑스 전역에 흉작으로 식료품을 비롯한 물가가 폭등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서민과 농민은 이런 가난으로 죽어가는데도 파랑스의 왕족과 귀족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루이 16세를 비롯하여 베르사유 궁전에서 흥청망청 연회를 늘 벌이고 온갖 사치와 유흥을 즐겼습니다.

    10월 5일 새벽에 7천 명의 파리 여성들이 폭우를 뚫고 6시간을 걸어서 베르사유 궁전을 향하여 행군합니다. 그들의 요구는 간단합니다 나에게 빵을 달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요구는 묵살당했습니다. 그들 앞에 주어진 것은 빵이 아닌 총과 대포로 무장한 군인들입니다 무력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루이 16세는 파리의 튈르리 궁전으로 연행되고 파리 시민의 감시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여신 마리안은 지도층의 압체와 폭압에 저항하고 항거하는 민중의 표상입니다. 자유 평등 박애의 상징입니다. 이때 마리안이라는 이름은 마리는 성경의 마리아에서 따온 것이고 안은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 안나에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프랑스에서 마리안의 선발되어가 있는데 이 선발에는 프랑스 시장들이 투표로 직접 뽑습니다. 10년에 한 번씩 전국의 시장들이 선발합니다. 이 작품 외에도 그의 작품으로는 수많은 그림들이 있습니다. 단테의 배, 히오스 섬의 학살, 묘지의 고아, 미숄롱기의 페허위에 선 그리스, 이교도 하산의 싸움등 그의 작품을 통하여 19세기 프랑스혁명 때의 문화를 이해하고 프랑스를 이해하는데 이 작품은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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