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화가이다. 그는 긴 인생을 살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그의 그림의 변천사와 작품 소개 입체파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입체파는 자연물을 다양한 시점에서 바라보고 자연의 다양한 형태를 단순한 기하학적 형상으로 바꾸어 2차원의 그림 공간에 재구성합니다.
피카소의 생애
파블로 피카소는 스페인 말라가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스페인 사람이지만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다 92세까지 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무명화가였습니다. 그느 어머니 성 피카소를 따랐습니다. 15살에 첫 번째 그림을 그렸는데 첫 번째 성찬식을 보면 이미 어릴 때부터 그는 그림에 소질이 있었습니다. 그가 영향을 받은 사람은 모네, 르느와르 그리고 고흐 고갱 등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미 19세에 인상주의 작품을 접했고 40세부터는 부도 누렸습니다. 그는 진보적인 사상 화가이기도 합니다. 피카소는 3만여 점의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피카소는 잘생긴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키가 163cm로 작은 키에 속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많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7명의 여자와 동거를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의 작품은 여자별로 구분하여 9개 시기로 나뉩니다. 요거나 사귀던 여자별로 화풍이 많이 변화를 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동거는 그의 나이 17살에 처음으로 동거를 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나이가 많은 31살인 페르낭드 올리바에였습니다. 그다음에는 에바 구엘과 동거했습니다. 26살에는 올가와 첫 결혼식을 했고, 그다음 여자는 17살, 29살, 22살 여자와 동거하다가 40살에는 26살의 여자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와 사귄 여자들 중 2명이 자살하는 등 그와 만난 여자는 불행했습니다.
청색시대 1901~04년
19살에 피카소는 1900년에 파리로 왔는데 그는 가난하여 빈민가에 살면서 그림을 그릴 물감을 살 돈이 없었던 가난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파리로 같이 왔던 고향 친구였던 카사게마스가 자살을 했습니다. 이 시대를 청색시대라고 불리는데 청색은 우울한 색깔입니다. 이 시기에 그는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 이 대표작입니다.
압생트는 당시의 파리의 빈민들이 먹던 값싼 술입니다. 피카소는 빈민가에서 물감을 살 돈도 없을 정도로 고생을 했는데 함께 고생한 친구까지 자살로 잃게 되었을 때 그는 얼마나 혼자 버려진 것처럼 고독했습니다. 청색시대에는 또 다른 유명 작품이 스페인의 유명한 사창가 포주를 그린 셀레스티나와 다림질 병에 걸린 여인 장님의 아침 식사 인생 등이 있습니다. 당시에 피카소는 병자 절망한 사람 노동자 시각장애인 알코올 중독자 등 빈민가의 사람들을 많이 그렸습니다.
장밋빛 시대 1905~06년
피카소에게 있어 그의 첫 번째 동거녀 페르낭드 올리비에와 동거했던 시저를 장밋빛 시대라고 합니다. 처음 여자를 만난 피카소에게 얼마나 장밋빛이었겠습니까 당시 올리비에는 유부녀였습니다. 아름답고 화가들 사이에서도 인기 있는 모델이었습니다. 피카소가 당시 인기 있던 여자와 사랑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영향으로 그의 그림은 전부다 훨씬 더 밝아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누드를 그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둘은 서커스를 자주 보러 다녔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는 곡예사 가족 곡예사와 어릿광대를 그렸습니다. 그의 그림이 이 시기부터 조금씩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림에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그의 작품 1908년에 그린 부채를 든 여인부터는 그가 입체파 시대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의 친구였던 조르주 브라크의 입체파 그림을 보고 피카소도 그리게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아무튼 피카소의 유명한 그림인 아비뇽의 처녀들도 이 시기에 그린 그림입니다. 캔버스에 유채화로 1907년 작품입니다. 지금은 뉴욕 현대 미술관 소장입니다.
피카소의 작품 입체파 아비뇽 처녀들
피카소의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이 입체파를 연 그림이다고 합니다. 입체파는 후기 인상주의 화가인 세잔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입니다. 사잔은 사과와 오렌지 등 정밀 그림에서 한 그림에 다양한 시점을 담아 그렸습니다. 자연물은 모든 형태의 원기둥, 구, 원뿔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야수파가 3차원의 사실 공간을 2차원의 그림 공간으로 옮겼다면 입체파의 대표 화가인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 입체파의 특징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아비뇽이라는 창녀촌의 여자들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피카소의 초창기 그림인데 평가가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 10년 후쯤에나 전시회에 내놓았습니다.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여자들의 시선이 앞으로 서있든 옆으로 서있든 뒤로 돌아 앉아 있든 모두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몸은 뒤로 돌아 앉아 있음에도 얼굴과 눈이 앞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의 카메라의 등장은 미술의 방향에 크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과거에 미술은 보이는 것을 그대로 화폭에 담는 것이 목적이었다라면 이제는 카메라 등장 이후에는 더 이상 그림이 사실 공간을 담는 것으로는 의미가 사라진 것입니다. 야수파의 화가 마티스가 그래도 그림은 색을 예쁘게 담을 수 있다고 말한 반면에, 입체파인 피카소는 내가 카메라 렌즈로 여러분을 볼 때와 그냥 내 눈으로 여러분을 볼 때 무엇이 다를까요?라고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의 눈보다 더 뛰어난 카메라가 없습니다. 인간은 우리가 누군가의 옆모습을 보더라도 옆모습 뒷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추론이 있습니다. 입체파는 형태를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그림에는 사물이나 사람의 앞면만이 아니라 옆면도 뒷면도 모두 담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나 사물의 본질에 더 근접하게 접근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피카소의 작품 보르데르의 의학도, 선원 다섯 명의 누드
피카소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리기 전에 여러 편의 습작을 그렸습니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작품들이 보르데르의 의학도, 선원 그리고 다섯 명의 누드라는 작품들입니다. 이 그림에서도 5명의 창녀와 함께 꽃과 화병 쾌락을 느끼려고 들어온 선원 해골을 든 의학도들이 나옵니다. 피카소는 이 작품을 통하여 쾌락과 방종을 경고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정작 완성된 아비뇽의 처녀들에서는 선원, 해골, 의학도 등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는 그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던 의도를 버린 것입니다. 입체파는 형태만 남고 그 자체의 미학만 남은 것입니다. 마치 자막이 없는 화면에서 화면만 남고 자막이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사실을 있는 서사가 사라지고 작품의 형태만 남은 것입니다. 이런 입체파의 작품들은 고갱과 세잔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세잔의 작품에는 다양한 시점들이 들어 있습니다. 체리는 위에서 내려다 본모습 꽃병은 옆에서 본 모습 복숭아는 비스듬히 본 모습 이러한 세잔의 시도가 이후에 입체파에게 영향을 준 것입니다. 고갱의 지켜보고 있는 망자의 혼을 보면 아프리카 탈이 나오는데 피카소는 고갱의 단순하고 강력함 원시성에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바로 세잔의 다섯 명의 목욕하는 여인들에서 모티를 가져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