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리얼리스트 쿠르베의 생애 작품을 통하여 그가 평생 규범과 관습 그리고 권력에 얽매이지 않고 도전하는 리얼리스트로 살 수 있었는지 그의 작품의 세계를 만나 보겠습니다.
쿠르베의 생애
귀스타브 쿠르베는 1819~1877년 스위스 접경지역인 프랑스 동부 프랑슈콩테 주의 농촌마을인 오르낭에서 태어났다. 그가 20살이 되던 해에 그는 파리로 이주했다 그해가 1839년이다. 그는 전통적인 미술교육에 회의를 느끼고 루브르 박물관 등에서 주로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루벤스 등 17세기 스페인과 네덜란드 화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영향을 받으며 그림의 세계로 들어왔다.
쿠르베는 1855년 제1회 파리만국 박람회에 자신의 그림 13점을 출품했다. 작품에는 오르나의 매장과 화가의 작업실을 전시를 요청했지만 이 작품들은 전시회에서 거부를 당했다. 전시회에 거부를 당하자 그는 이 그림을 옆에 가건물을 지어서 리얼리즘이라는 제목을 내걸고 전시회를 따로 열어 버렸다. 그리고 ” 내가 사는 시대의 풍속과 관념, 사회상을 오직 나 자신의 평가와 판단에 의해 표현한다”라는 선언문을 발표하게 된다.
그가 리얼리즘의 선두주자로 손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는 18세기의 중엽에 시작된 산업혁명이 19세기 사회를 엄청나게 바꾸어 가기 시작할 때이다 수공업 중심이던 산업도 제조업으로 기계제 공업으로 바뀌어 갔고 증기기관차는 유럽을 손쉽게 오갈 수 있도록 철도 노선이 놓이기 시작했다
이런 산업화로 인하여서 도시로 도시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부르주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그들은 싼값에 사람을 고용해서 더 많은 수익을 벌게 되고 이로 인해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하되어지고 미술도 이런 시대를 반영하여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혁명적 이상을 추구하던 신고전주의는 꿈의 좌절로 인한 불안과 슬픔 공포 등의 내면을 그리던 낭만주의에 이어서 이제는 사실적 현상이 중요시되고 그것을 그리는 화풍 리얼리즘 사실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리얼리즘의 대표자가 바로 쿠르베이다.
리얼리즘
쿠르베는 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리지 않는다 천사를 내 눈앞에 데려오면 천사를 그리겠다.라고 유명한 말을 남긴다. 그는 리얼리즘이라는 것은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이후에 나타나서 1840년부터 1870년까지 프랑스 회화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새로운 화풍이었다.
리얼리즘의 특징은 그림들이 신, 이상화된 영웅, 왕이나 귀족 이런 특별한 존재와 사람들이 아니라 이제 눈에 보이는 노동자 농민들 그리고 당대의 인물들과 그들의 일상적인 삶들 또한 눈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자연을 대상으로 화폭에 담기 시작하였다.
리얼리즘에서는 미가 아니라 현실이 중요시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그림에서는 단순한 사회 구조의 모순을 담고 혁명을 지지하기도 했다. 리얼리즘 이후에 사회주의 리어리즘으로 관심이 옮겨 가는 이유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쿠르베의 작품 설명
상처 입은 남자
쿠르베의 작품 중 상처 입은 남자는 1844~1854년에 걸쳐서 완성판 작품이다. 크기는 1.5*97.5cm의 크기로 지금은 오르세 미술관 소장 중이다. 이 그림은 한 남자가 바로 자신이 피를 흘리며 누워 있다 그는 어떤 상황을 설정한 후 감정을 담아 연기를 하는 자화상을 여러 편 담아냈다 당시의 시대와 끊임없이 불화하며 살았던 이 리얼리스트에게도 의외로 낭만적이고 자기애적인 모습이 있다.
쿠르베의 이미지는 급진적인 정치가적인 이미지이다. 그리고 리얼리스트로서 노동자 농민을 주로 그린 것 같지만 그의 그림은 풍경, 정물, 초상 누드 그림도 많이 있다. 그의 작품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에서는 수수한 등산복 차림의 남자가 바로 화가인 자신이다 그는 산을 오를 때 중요한 자신의 후원자를 만나게 되는데 쿠르베의 모습은 당당하고 오만해 보이기까지 보인다
화가로서도 그는 자의식이 충만했던 자신의 모습을 그림에 담아 남겼다. 쿠르베는 평생 국가 권력과 전통적인 미술계 등에 반발하면서 규범과 관습에 반항을 하였다. 그는 1870년에는 프랑스 최고의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거부했고 1871년에는 파리코뮌에서 열리는 미술인 동맹 대표였으며 결국 그는 1873년에는 스위스로 망명해서 그곳에서 삶을 마치게 된다.
평생을 그는 규범이나 관습에 저항하면서 도전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 잠, 세상의 기원은 이런 그의 기질을 잘 나타내어 주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거든 그는 자유의 규칙 외에는 어떤 학교 교회 기관 아카데미 정부에도 속하지 않았다고 말해 달라 나는 사회주의자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자, 공산주의자, 혁명이 의미하는 모든 것의 지지자이며, 무엇보다 나는 리얼리스트이다.
화가의 작업실
화가의 작업실은 그가 1855년에 완성한 작품으로 360*598cm 크기이며 오르세 미술관 소장이다. 이 그림은 1855년 제1회 파리만국박람회에서 전시를 거부당했다. 이 그림의 부제는 7년 간의 예술적 도덕적 삶을 요약하는 진정한 알레고리이다. 알레고리는 그리스어로 다른 과 말하기가 합성된 알레고리아의 영어식 표현인데 1848년에 혁명 이후 자신의 세계를 정리한 작품이다
이 그림의 왼쪽을 보면 상인, 신부, 창녀, 무덤 파는 사람 등 당시의 부르주아와 일반 서민, 그리고 사냥꾼 모습으로 변장한 폭군 나폴레옹 3세도 등장한다. 오른쪽에는 친구들인 철학자 작가 시민 등이 있다 맨 오른쪽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라는 보들레르이다. 쿠르베는 온갖 사회 계층의 사람들을 그려 넣어 부조리한 현실사회를 우회적으로 표현을 한 것이다.
자신만의 주체적인 사고를 가지고 자신의 자의식을 담았다. 화가의 작업실은 아틀리에에서 쿠르베가 화가로의 자존심을 드러낸 이젤 앞에 앉아 커다란 캔버스에 풍경화를 그리고 있다. 쿠르베의 뒤에는 모델이 옆에는 소년과 흰고양이도 보인다.
오르낭의 매장
오르낭의 매장도 제1회 파리만국박람회에서 전시를 거부당한 작품이다. 왜 이 작품들이 전시를 거부를 당한 것 일가 그것은 쿠르베의 고향이 오르낭에서 동네 사람들이 죽고 장례를 치르는 중이다. 동네 신부가 와서 종배성사를 하고 이웃 사람들이 십자가를 들고 있고 무덤을 파서 매장을 하려는 순간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동네의 지인이 죽어서 장례를 치르는 것을 화폭에 담은 것인데 쿠르베는 1849~1850년 고향인 오르낭에서 부모님과 여동생 공무원 성직자 등 주변 사람들을 모델로 이 작품을 그렸다. 이 그림은 6.68*3.15m로 괴장히 큰 작품이다
이렇게 큰 캔버스 전에는 위대한 인물이나 신 왕 등을 그리는 것이다. 나폴레옹 대관식 같은 역사화를 그리는 크기이다. 그런데 부르 베는 지금 이런 거대한 캔버스에 50여 명의 그냥 평범한 사람들을 거의 실물 크기로 그려 버린 것이다. 이게 당시의 역사적 대상을 보통통의 시골 사람들 주면의 인물로 그들을 등장의 주연으로 끌어올려 표현한 것이다.
진정한 영웅은 어떤 특별한 존재들이 아니라 바로 이런 소박하고 진실된 삶을 살아가는 시민들의 일상이라는 표현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당국에서는 당시의 권력층은 이런 그림을 좋아할 리 없었다. 그래서 당시 지배층이 이 그림을 크게 비판한 것이다.
오르낭의 매장을 보면 아무리 성직자나 시장이나 재판관이라 할지라도 크게 부각해서 그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조명이나 색이나 이런 것으로 강조하지도 않고 리얼리즘으로 본질적인 민주주의적인 미술로 그린 것입니다. 바로 쿠르베의 말대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