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스무하 박물관 탐방기

알폰스무하 박물관 탐방기

안녕하세요 레헴 하우스 입니다. 작년 봄, 독일-체코 여행 중 프라하를 방문했습니다.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니 알폰스 무하 박물관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 박물관은 무하 재단이 운영하는데, 무하가 사용한 도구들과 스케치, 자녀들을 그린 그림 등을 볼 수 있습니다.

1860년에 태어난 알폰스 무하는 화가 지망생으로 시작했지만, 크리스마스 즈음 연극 포스터를 그리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무하의 작품들은 한 시대를 지배했고,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알폰스무하 박물관은 그의 공을 기리며 체코 프라하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무하의 뛰어난 예술성과 작품은 계속해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전해줄 것입니다.

알폰스 무하: 화가의 탄생과 성공

알폰스 무하(Alfons Maria Mucha)는 1860년에 태어나 나이가 서른을 넘어도 불투명한 화가 지망생으로 존재하며 파리에서의 그림 공부가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크리스마스 전후에 사라 베르나르가 연출한 연극 “지스몬다(Gismonda)”의 포스터를 그리게 되며 인생의 기회를 맞이했습니다.

포스터는 너무 아름다워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줘 베르나르와 6년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무하는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게 되었습니다. 베르나르와 함께 여성판 “햄릿”을 포함한 여러 대표작을 그림으로 출간하며 19세기 말에 강렬한 일러스트를 선보였습니다.

대표 작품 목록 연도
네 예술(The Four Arts) 19세기 말
네 시간(The Times of the Day) 19세기 말
네 꽃(The Four Flowers) 19세기 말

일러스트에서 넷씩 짝을 지어 그림을 그렸던 무하는 그의 작품에서 일본 판화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를 통해 대량 인쇄가 용이하면서도 미려한 작품을 선보이며 인기를 얻었고, 이는 무대 미술부터 인테리어, 장신구까지 다방면으로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무하의 작품은 아르누보의 유행이 지나고도 현대 디자인 및 만화의 시조로 남게 되었습니다.

민족주의적 유화와 역작의 탄생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미국에 머물던 무하는 1910년에 고향인 체코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무하의 작품은 디자인과 석판화에서 민족주의적 유화로 변화했습니다. 특히 1차 세계대전의 혼란이 여러 나라를 강타하던 시기, 무하는 민족적 색채가 짙은 그림들을 창작했습니다.

그 중 박물관에서 감동을 준 그림 “별(Hvězda)”은 당시 동유럽의 상황을 고발하는 작품으로, 무하의 필생의 작품이자 최고의 역작으로 평가받았습니다.

무하는 1912년부터 1926년까지 슬라브족의 역사를 담은 대형 그림 “슬라브 서사시(Slovanská epopej)”를 그렸습니다. 이 작품은 서양 미술사와는 다른 민족적인 색채로 가득한 작품으로 극과 극으로 평가를 받았지만 대단한 작품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작품이 완성된 후 프라하로 기증되었지만 별도 전시관 건립 약속이 이행되지 않아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프라하의 유리창 화가

무하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인 스테인드 글라스는 오랜 공사 끝에 완공된 성 비투스 대성당에 장식되었습니다. 무하의 디자인과 스케치는 유리 예술가 얀 베슬리의 손을 통해 옮겨져 1931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이후 무하는 책을 쓰고 회고전을 가졌으나 1939년 나치 독일의 체코 점령으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민족주의자로 인해 체포되어 폐렴으로 서둘러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알폰스 무하의 작품은 대중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으나 무하의 일생을 살펴봄으로써 더욱 그의 작품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현재 알폰스 무하 박물관이 그의 유산을 보존하며 후손과 시 관계자 간의 긴 소송이 계속되는 상황이지만 그의 훌륭한 작품들이 더 많은 이들에게 공개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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